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22) 7. 율곡과 우계, 그들의 학문 (2) 조선사상의 고향, 밤골과 소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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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 (22)
7. 율곡과 우계, 그들의 학문
(2) 조선사상의 고향, 밤골과 소개울
뒷동산에서 밤 가시에 찔려보지 않은 어린 시절이 있을까? 동산에 밤나무가 없었다면 아이들은 그만큼 심심했을 것이다. 밤나무는 기억 속 마을의 한 풍경을 담는다. 이런 곳도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시인은 그곳을 고향이라 했다. 뒷산엔 밤나무가 있고 앞으론 소 울음 우는 개울이 흐르는 곳, 그곳은 어제를 산 모든 이들의 고향일 터. 밤골과 소개울이 마을이름에 종종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디에 있어도 그럴법한 마을이 임진강에도 있다. 파주시 파평면의 밤골과 소개울(소개). 두 마을은 길을 따라 이십 리 남짓 떨어진 이웃이다. 마을은 ‘교목이 우거진 숲과 오솔길’을 따라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다. 이 특별할 것 없는 시골마을은 어느 때부턴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게 된다. 상상은 필요 없다. 밤골과 소개울를 한자로 옮기면 그만이다. 밤송이가 벌어지고 소 울음이 들릴 것 같던 풍경은 사라지고 확연히 다른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 율곡리 화석동. 친구가 그리울때면 율곡은 이 길을 따라 우계를 향했다.
율곡과 우계. 고향에 대한 추억은 부서지고 태산북두 같은 사유의 무게가 내리 누른다. 우리말과 한자말의 변환이 가져오는 차이를 이보다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율곡은 전국의 밤골을 합쳐도 그릴 수 없는 곳에 있다. 우계 역시 소개울이 제아무리 흘러도 이를 수 없는 곳에 서 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두 거학이 갑자기 한 날 한 장소에 나타나 마주침으로써 조선의 학문은 섬광처럼 빛나게 된다.
“올해도 다 저물고 눈이 산에 가득한데/ 들길은 가늘게 고목나무 사이로 갈렸구나/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느냐/ 내 우계에 있는 미인이 그리워서라네(이이. 「눈 속에 소를 타고」 일부)”
시인은 율곡리, 밤골을 출발해 우계 즉 소개울을 향하고 있다. 눈이 가득한 들길을 소를 타고 간다. 길은 가늘게 숲 사이로 이어진다. 어깨가 들썩인다. 소걸음 때문일까? 아마도 곧 만날 우계의 벗이 기다려져서일 것이다.
이런 때도 있었다. 벗들이 먼저 율곡을 찾았다. 그들은 화석정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실컷 떠든다. 그리고 새벽 같이 서둘러 우계로 간다. 이때는 소가 아니라 말을 탔다.
“손님네와 말고삐 나란히 하고 들녘 집 찾아가/ 정자에서 술 불러다가 난간에 기대어 마신다./ (…) / 새벽에 여윈 말 재촉해 푸른 산 거쳐서/ 계당에 나아가 고인의 안부 묻는다/ 빈 창에 마주 대하매 맑아서 잠 못 이루고/ 남기에 갈관 젖을 대로 젖게 내버려둔다.(이이. 「이의중 이경로와 함께」)”
모여 앉은 그림자가 빈창에 비추고, 창밖으로 웃음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은 장면이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견인하는 자장 안에서 헤어질 줄 몰랐다.
▲ 늘노리 소개울. 우계와 율곡은 개울에 앉아 헤어질 줄 몰랐다. 둘의 만남은 늘 그런 식이었다.
“높은 나무 시냇가에 둘러 있으니/ 맑은 그늘 낚시터에 흩어지네/ 흐르는 냇물은 원래 쉬지 않고/ 물고기와 갈매기는 절로 기심을 잊는다오/ (…) / 한가로운 사람 손에 책을 펴 보며/ 서로 마주하여 돌아갈 줄 모르네(성혼. 「율곡과 함께 시냇가에 앉아서」)”
율곡과 우계는 열아홉, 스물 나이에 이웃으로 처음 만난다. 율곡은 어머니 상을 치르며 삶의 무상함을 고뇌하고 있었고, 우계는 이미 병이 깊어 벼슬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와중이었다. 만남 이후로 둘은 서로에 대해 부단히 격려하고 충고하며 가까이 했다. 율곡은 적극적으로 벼슬에 나아갔고, 우계는 불러도 물러나 앉은 처사였지만 반목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아 빈 곳을 채워갔다. 둘은 혼자서는 이를 수 없는 경지를 열어갔다. 밤골과 소개울, 듣기만 해도 정겨운 작은 마을에 그들의 고민과 각성과 성취가 오롯이 새겨있다. 밤송이보다 단단히, 소울음보다 깊게.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 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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